오래된 친구와 언제 만나도 어색하지 않은 이유는 함께 공유하고 있는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. 버튼을 누르면 나오는 그때 그 순간의 이야기는 몇 번을 반복해도 지겹지 않고 오히려 서로 다르게 기억하고 있는 상황을 재해석하고 세밀하게 분석해 퍼즐을 맞추기도 한다. 그 기억을 우린 추억이라 부르며 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을 할 정도로 과거에 대한 회상은 살아가는 밑거름이 된다.

어린 시절 이맘때 아침이면 쌀쌀해져 이불에서 나오기 싫어지던 그 찬 공기와 마당에서 들리던 비질하는 소리, 압력밥솥의 치익하고 김빠지는 소리와 밥 냄새가 떠오른다.

요즘 전기밥솥이 친절하게 맛있는 백미가 완성됐다며 밥을 잘 저어달라는 메시지가 나오면 그날의 아침이 생각난다. 어린 나와 젊은 엄마, 아빠의 모습이 스치며 미소 짓게 된다. 그때의 분위기, 냄새, 흐르던 음악까지 있었다면 그 기억의 깊이는 더 깊고 굵을 것이다. 음악이 기억으로 가는 길의 윤활유를 뿌려놓은 듯 유기적으로 현재와 과거를 오가게 된다. 누구에게나 그런 음악이 있을 것이다. 들으면 자연스럽게 필름이 돌아가는 기억 소환버튼 말이다.

필자에게는 빌리조엘의 피아노 맨이 그 어떤 음악보다 기억을 찾아주는 음악이다. 십수 년 전 고단한 외근을 마치고 늦은 오후 사무실로 복귀하던 차 안에서 동료와 한마디 말도 없이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. 깊은 가을 플라타너스의 커다란 잎이 물고기 떼처럼 바람 따라 이러저리 흔들리며 붉은 하늘 속으로 쏟아지고 있었다. 눈으로는 모든 걸 보고 있었지만 이미 지칠 때로 지친 우리에겐 그저 흔한 가을 오후의 풍경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. 그 순간 라디오에서 하모니카 소리와 함께 시작된 빌리조엘의 피아노맨이 흘러나왔고 음악이 흐르는 5분여 시간 동안 그 상황을 하나하나 깊은 기억 속으로 저장시키고 있었다. 현재는 이직을 하고 인생 친구가 된 그 동료와 가을이 되면 그날의 분위기와 감정 그리고 하늘의 색깔과 낙엽의 속도까지도 생생하게 묘사하며 이야기를 하게 된다.

그때그때 이야기가 좀 더 부풀려지기도 하고 하늘의 색이 좀 더 붉어지기도 한다. 분명 외근에서 받았던 스트레스가 우리를 침묵으로 만들었지만 돌아오던 길에서 만난 그 음악이 그날을 아름다운 기억 저장해 추억 상자로 보내 버렸다. 올해도 또 내년에도 가을이 되면 피아노맨을 찾아 듣게 되고 우연히 그 음악과 마주하게 된다면 그 친구를 떠올릴 것이다.

영화 OST나 드라마 주제곡이 이야기를 좀 더 강력하게 기억할 수 있게 하는 수단이며 그 이상으로 지배적이기도 하다. 이별한 사람과 사랑에 빠진 연인에게 다가오는 노래가 다를 테고, 어린아이와 어른들이 부르는 노래가 다를 것이다. 하지만 그들의 감정을 어루만지고 우리의 추억창고에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저장될 것이다. 그리고 그 음악은 기억창고를 열어주는 열쇠처럼 기억을 소환시켜주는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된다.

우리에게 음악은 살아가는 이야기이기도 위로와 격려도 된다. 점점 그런 음악들이 쌓이면 나만의 앨범을 만들 수 있고 앨범의 곡목 리스트를 통해 한 사람의 인생을 엿보는 자서전이 되지 않을까. 평범한 일상을 아름다운 기억으로 저장시킬 수 있는 음악. 오늘의 한 곡, 소중한 사람과 나눠 보실 길 바란다.